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학 실험실 장면을 보면 항상 투명한 유리로 된 도구들이 가득한데요.
비커부터 플라스크, 스포이트까지 온통 유리인 걸 보면 문득 궁금증이 생기곤 합니다.
세상에는 플라스틱이나 금속처럼 튼튼하고 가벼운 소재도 많은데, 왜 하필 까다로운 화학 물질을 다루는 곳에서는 유리를 고집하는 걸까요?
여기에는 아주 명확하고 과학적인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사실 유리가 화학 실험의 '국민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안정성' 때문이거든요.
대부분의 화학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는 독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리는 어떻게 이런 철벽같은 안정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을 알려면 유리의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유리의 주성분은 '규소(Silicon)'와 '산소(Oxygen)'가 만나 만들어진 '이산화규소(SiO2)'인데요.
이 규소와 산소의 결합은 원자 세계에서도 소문난 잉꼬부부처럼 아주 강력하고 단단한 관계입니다.
이미 둘이서 너무나 안정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다른 화학 물질이 끼어들 틈을 거의 주지 않거든요.
마치 이미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더 이상 다른 조각과 맞춰질 필요가 없는 상태인 셈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리는 이미 '산화'가 끝난 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나무가 타는 것은 나무의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격렬하게 반응하는 '산화' 과정입니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규소가 산소와 충분히 결합해 '이산화규소'라는 재가 된 것과 같은 상태라서, 더 이상 탈(반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화학 물질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안정성을 자랑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듯이, 이런 철옹성 같은 유리에게도 무서운 천적이 존재하는데요.
그 주인공은 바로 화학계의 '파괴왕'이라 불리는 '플루오린(Fluorine)'이라는 원소입니다.
이 플루오린은 어찌나 반응성이 강한지, 견고하기로 소문난 규소-산소 결합까지 깨뜨리고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거든요.
그래서 플루오린이 포함된 '불산(Hydrofluoric acid)'은 유리를 녹여버리는 무시무시한 물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플루오린이라는 원소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외국의 한 화학자 부부가 원소 주기율표 순서대로 결혼기념일을 챙기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결혼 2주년은 원자번호 2번인 '헬륨(Helium)' 기념일이라 헬륨 풍선을 선물하고, 3주년 '리튬(Lithium)' 기념일에는 리튬 배터리를 선물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원자번호 9번, 결혼 9주년 '플루오린' 기념일이었는데요.
집안을 통째로 날려 먹지 않으면서 '플루오린'을 선물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부부가 함께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찾아낸 기가 막힌 선물이 바로 '치약'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치약에는 충치 예방을 위해 플루오린 화합물인 '플루오린화 나트륨(Sodium fluoride)'이 들어있거든요.
정말 화학자다운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해결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치약은 플루오린의 가장 순한 맛에 불과한데요.
화학자들 사이에서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물질' 목록에 단골로 오르는 '삼플루오린화염소(Chlorine trifluoride)' 같은 녀석도 있습니다.
이 물질에 대한 한 전문가의 평가는 그 악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이 물질은 알려진 모든 연료와 즉시 반응해서 불을 붙이며, 심지어 천, 나무, 모래, 석면, 물과도 격렬하게 폭발적으로 반응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심지어는 강철이나 구리 같은 금속 표면에 얇은 불소 피막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게 두지 않으면, 그 금속마저 태워버리는 화재를 일으키거든요.
그래서 이 물질로 인한 화재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아주 좋은 운동화 한 켤레'를 추천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제외하면, 유리는 여전히 가장 훌륭한 보관 용기 중 하나인데요.
투명해서 내용물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표면이 매끄러워 세척이 쉬우며, 열에도 비교적 잘 견디는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유리가 '모든 것'에 완벽하게 비반응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강한 염기성 용액인 수산화나트륨(Sodium hydroxide)에 장시간 노출되면 유리가 서서히 손상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학교 실험실에서는 정밀한 측정이 필요한 뷰렛에는 산을 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커에 염기를 담도록 가르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상과 실험실에서 유리를 안전하고 유용하게 사용하는 건, 유리가 가진 '압도적으로 안정적인 화학 구조' 덕분인데요.
하지만 세상에 영원하거나 완벽한 것은 없듯, 유리조차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물질들이 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지 않나요?
오늘은 우리가 매일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유리의 놀라운 안정성과 그 속에 숨겨진 화학 이야기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