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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대기근, 홀로도모는 왜 우크라이나를 겨냥했나?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스탈린의 대기근, 홀로도모는 왜 우크라이나를 겨냥했나?

1933년, 소비에트 연방(소련) 전역을 휩쓴 끔찍한 대기근이 있었는데요.

이 비극으로 무려 600만에서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6000만 명은 굶주림을 직접 겪거나 목격하며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는 20세기 최악의 기근 중 하나로 기록되었거든요.

그런데 희생자들을 분석해 보면 한 가지 섬뜩하고도 명백한 패턴이 드러납니다.

바로 당시 소련 전체 인구의 20%에 불과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이 기근 사망자의 40% 이상을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이 사건을 '홀로도모(Holodomor)', 즉 '기아를 통한 학살'로 규정하고 있는데요.

과연 홀로도모는 그저 흉년이 빚어낸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였을까요, 아니면 스탈린 정권이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인위적인 재앙이었을까요?

단순한 흉년 그 이상이었던 이유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1933년의 대기근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이례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데요.

당시 소련은 이전에도 1892년과 1922년에 큰 기근을 겪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기근 모두 극심한 가뭄이 주요 원인이었고, 특히 곡창지대인 러시아 남부의 '볼가(Volga)'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거든요.

하지만 1933년의 대기근은 그 양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망자 수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의 중심지가 전통적인 가뭄 지역인 볼가가 아닌 '우크라이나'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1932년의 날씨가 이전보다 10배는 더 나빴던 걸까요?

놀랍게도 기록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1932년의 곡물 수확량은 물론 평년보다 낮았지만, 훨씬 더 적게 수확하고도 사망자가 더 적었던 1921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심지어 기근이 없었던 1936년의 수확량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죠.

이는 결국 국가 전체에 식량이 부족해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진짜 원인은 날씨가 아니라 스탈린의 정책에 있었습니다.

재앙의 씨앗, 집단농장화와 곡물 강제 수매

문제의 핵심은 부족한 식량이 아니라, 그 식량을 통제하고 분배하는 '시스템'에 있었는데요.

1929년 말, 스탈린은 '농업 집단농장화(collectivisation)'라는 급진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의 토지, 가축, 농기구를 모두 몰수해 거대한 집단농장을 만들고, 모든 생산물을 국가가 통제하는 방식이었죠.

열심히 일해봤자 모든 잉여 생산물을 국가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농민들의 생산 의욕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1931년과 1932년의 수확량 급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재앙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바로 '곡물 강제 수매(procurement)' 정책이었는데요.

스탈린은 수확량 감소가 농민들의 '태업과 식량 은닉' 때문이라고 믿고, 오히려 더 가혹하게 곡물을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집단농장화 덕분에 수백 가구를 일일이 뒤질 필요 없이 농장 창고 하나만 털면 되었거든요.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이 평년보다 줄어든 것을 알면서도, 전체 생산량의 40%가 넘는 곡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곡물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되거나 해외로 수출되었고, 정작 식량을 생산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수중에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조차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데이터가 밝혀낸 '우크라이나'라는 표적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단지 비옥한 곡창지대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더 큰 고통을 겪었던 걸까요?

안타깝게도 데이터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스탈린 정권의 정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크라이나인'을 겨냥한 체계적인 편향성을 보였습니다.

첫째, 집단농장화 정책은 유독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훨씬 더 강압적이고 강도 높게 시행되었습니다.

둘째, 1932년의 곡물 수매 과정에서도 비슷한 수확량을 거둔 다른 지역에 비해 우크라이나인 거주 지역에서 훨씬 더 많은 양의 곡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러한 차별적인 정책은 결국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는데요.

토양의 질, 날씨, 과거 생산량 등 다른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통제하고 비교해도, 우크라이나인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기근으로 인한 사망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경향이 우크라이나 공화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나 벨라루스 내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었다는 점이죠.

이는 정권의 탄압이 특정 '지역'이 아닌 특정 '민족'을 향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의도였을까, 결과였을까?

물론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여라'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한 '결정적 증거(smoking gun)'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18년 잠시나마 독립을 선언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에 대해 스탈린은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집단농장화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간주했거든요.

결국 의도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 결과는 명백했습니다.

스탈린의 집단농장화와 강제 수매 정책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체계적으로 겨냥했고, 이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인위적 재앙, 홀로도모로 귀결된 것입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는 것을 넘어, 권력이 어떻게 한 민족의 운명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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