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하면 떠오르는 건 설산과 등산객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사실 이 산맥 남쪽 자락엔 수천 년 문명이 켜켜이 쌓인 ‘네팔(尼泊爾)’이라는 나라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쪽으론 ‘티베트(西藏)’, 나머지 세 면은 모두 ‘인도(India)’와 맞닿아 있는 내륙국인데요.
남쪽 평원에서 북쪽 고봉까지, 지형 하나하나가 이 땅의 운명을 결정해온 듯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지금의 ‘가트만두(加德滿都) 계곡’은 원래 거대한 호수였다고 해요.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산을 깎아 물을 빼내고, 비로소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키라티(Kirata)’라는 티베트계 부족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왕국을 일궜고요.
그런데 기원전 6세기, 이 땅 남쪽 ‘룸비니(藍毗尼)’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순식간에 ‘불교 성지’로 부상했고, 이후 수백 년간 인도교와 불교 문화가 뒤섞이며 독특한 예술 양식이 꽃피었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사원들과 조각들은 대부분 그 시절 유산입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와 학계에서는 이 아름다운 서사 뒤에 감춰진 치열한 가치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네팔의 역사를 단순한 ‘소국의 고난사’로 보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려다 고립된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정체성을 팔아넘긴 것’인지로 갈라져 싸우고 있거든요.
5세기 무렵 ‘리차비(Lichhavi) 왕조’가 등장해 안정적인 통치를 시작합니다.
특히 ‘가트만두 계곡’에 궁전과 사원을 대거 건설하며, 네팔 고전 건축의 초석을 다졌어요.
이 시기는 단순한 정치적 안정기가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점이었는데요.
한쪽에선 리차비 시대를 ‘자율적인 문화 창조기’로 봅니다. 외부 영향 없이 자신만의 미학과 종교 공간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순수한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반면 다른 쪽에선 ‘이미 그때부터 주변 강국의 문화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인도교 신화와 티베트 불교가 혼합된 건 ‘독창성’이 아니라 ‘지정학적 압박 속의 타협’이라는 해석이죠.
13세기, 진짜 황금기가 찾아옵니다.
‘마라(Malla) 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가트만두’, ‘파탄(Patan)’, ‘바드강(Bhadgaon)’ 세 도시가 예술의 심장으로 떠올랐거든요.
지금도 볼 수 있는 정교한 목각과 청동 불상, 높이 솟은 불탑들은 대부분 이 시기 작품입니다.
다만 후기에 와서 왕국이 셋으로 쪼개지며, 외부 위협에 취약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겼죠.
이 분열기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한쪽에선 “분열이 있었기에 각 도시가 경쟁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경쟁이 오히려 창의성을 불렀다는 주장이죠.
다른 쪽에선 “분열이 네팔을 외세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만약 통일된 왕국이었다면 18세기 영국의 침공에도 더 잘 버텼을 거라는 겁니다.
18세기 중반, 서부 ‘구르카(Gorkha)’ 출신의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가 난국을 수습합니다.
1769년 가트만두를 점령한 뒤 영토를 확장하며, 현대 네팔의 기틀이 된 ‘샤(Shah) 왕조’를 세웠어요.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초 ‘영국-네팔 전쟁’에서 패배하며, ‘수골리 조약’으로 오늘날의 ‘시킴(Sikkim)’과 같은 영토를 빼앗기게 되죠.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 신세가 됐고 외교권마저 제한당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라나(Rana) 가문’이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며 백 년간 문을 닫아버립니다.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이 정체된 상태가 이어졌고, 변화의 바람은 1951년에야 불기 시작했어요.
민중 봉기로 라나 체제가 무너지고, 다시 왕정이 복귀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달랐습니다.
1960년 ‘마헨드라 국왕’이 정당을 해산하고 ‘판차야트 체제’라는 이름의 군주독재를 시작했지만,
결국 1990년, 국민의 압력 앞에 굴복해 ‘군주 입헌제’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됐고, 1996년엔 ‘마오이스트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시작합니다.
10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가 전체가 피로 물들었죠.
2006년, 마침내 민주세력과 마오이스트가 손잡고 왕권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연방 민주공화국’으로 새출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이 나옵니다.
왕관을 버린 건 ‘민주주의 신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까요.
왕실 총기 난사 사건, 내전, 국제사회의 압박 — 모든 요인이 겹친 결과라면, 그건 이상보다는 생존의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치권은 여전히 분열돼 있고, 정부 교체는 반복되며, 헌법 시행도 번번이 좌절되고 있죠.
2015년엔 대지진이 덮쳐 9천 명 가까운 생명을 앗아갔고, 인프라는 초토화됐습니다.
재건은 더디게 진행 중이고, 경제는 아직도 농업과 해외 송금에 의존하고 있어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지정학적 운명도 버겁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 땅의 역사는 늘 그랬듯, 위기 속에서도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땅이자, 히말라야 문명의 교차로였던 이곳.
지금도 ‘네팔’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고통, 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가는지.
그 모든 이야기가, 바로 이 산맥 아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죠.
우리가 네팔을 바라볼 때, 단순한 관광지나 재난 피해국이 아니라, ‘정체성과 생존 사이에서 줄곧 선택을 강요받아온 인류의 축소판’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