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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프랑스 최악의 폭군인가 최고의 태양왕인가

루이 14세, 프랑스 최악의 폭군인가 최고의 태양왕인가

역사를 통틀어 한 명의 군주가 한 나라의 운명을 이토록 극적으로 바꿔놓은 경우가 또 있을까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하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 바로 루이 14세입니다.

무려 72년이라는, 역사상 가장 긴 재위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를 유럽의 패권국으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사회적 갈등을 남기며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오늘은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그의 삶을 통해, 그가 과연 프랑스 최고의 국왕이었는지, 아니면 최악의 독재자였는지 그 논쟁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짐이 곧 국가다", 절대 권력은 어떻게 탄생했나

그가 왜 그토록 절대적인 권력에 집착했는지 알려면 그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봐야 하는데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프롱드의 난'이라는 귀족들의 반란을 겪으며 왕권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혼란과 위협은, 훗날 그가 권력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1661년, 그의 섭정을 돕던 마자랭 재상이 사망하자 23살의 청년 국왕 루이 14세는 더 이상 재상을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요.

이때 남긴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은, 모든 권력이 오직 왕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절대왕정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선언이었습니다.

화려한 감옥, 베르사유 궁전의 비밀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완벽한 도구가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화려한 궁전을 넘어, 프랑스 귀족들을 가두는 '황금 새장'이었거든요.

루이 14세는 전국의 힘 있는 귀족들을 모두 베르사유로 불러들여, 끝없이 이어지는 연회와 사치스러운 궁정 행사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의 아침 식사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상이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의식이었습니다.

이 화려한 궁정 생활에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관직이나 명예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내팽개치고 베르사유에 머물며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결과적으로 귀족들은 지방에서의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잃고, 왕에게 의존하는 화려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베르사유의 눈부신 황금빛은 곧 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빛이었습니다.

태양왕의 금고를 채운 남자, 콜베르의 마법

하지만 이런 엄청난 궁전을 짓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일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요.

여기서 바로 그의 유능한 재무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등장하는데요.

콜베르는 '중상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을 통해 프랑스의 국부를 극대화했습니다.

쉽게 말해, 수입은 최대한 억제하고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서 금과 은을 나라 안으로 끌어모으는 전략이었거든요.

이를 위해 그는 리옹의 비단, 고블랭의 태피스트리 같은 사치품 공장을 국가적으로 지원해 프랑스산 제품을 유럽 최고의 명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도로와 운하 같은 인프라를 건설해 물류를 원활하게 하고, 강력한 해군을 만들어 프랑스 상인들이 안전하게 무역할 수 있도록 보호했습니다.

콜베르가 채운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루이 14세는 자신의 야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태양의 그림자, 끝없는 전쟁과 종교 탄압

하지만 태양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입니다.

그의 통치에는 분명한 어두운 면이 존재했거든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라는 그의 신념 아래, 1685년에는 신교도(위그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입니다.

이 조치로 수십만 명의 신교도들이 신앙을 버리거나, 혹은 모든 재산을 버리고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유능한 상공업자와 기술자들이었다는 점인데요.

단기적으로는 종교적 통일을 이뤘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의 귀중한 인적 자원과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또 다른 어두운 유산은 바로 '전쟁'입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프랑스의 국경을 '자연 국경(라인강)'까지 확장하려는 야망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끝없는 전쟁은 막대한 재정을 소모시켰고, 그의 통치 말년에는 프랑스를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려놓았습니다.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평범한 백성들의 몫이 되었고, 민심은 서서히 왕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사랑한 나를 닮지 마라", 모순된 유산

1715년, 72년간의 기나긴 통치를 마치며 그는 어린 후계자 루이 15세에게 "전쟁을 너무 좋아했던 나를 따라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이는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한 시대의 절대 군주가 남긴 씁쓸한 자기반성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오랜 전쟁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루이 14세의 유산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모순' 그 자체입니다.

그는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고 베르사유 궁전과 눈부신 문화를 남겼지만, 그의 절대 권력과 무리한 전쟁은 결국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폭풍의 씨앗을 뿌린 셈이거든요.

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을까요, 아니면 가장 이기적인 독재자였을까요.

3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유럽 역사에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태양과도 같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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